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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예릉발견 경위 및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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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옥진 황제와 그 묘장연구’에 나와 있는 황제릉 발굴당시의 모습

명씨시조 대하국 태조, 흠문소무 명옥진 황제께서는 과거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1366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해 명사, 명옥진전(明史, 明玉珍傳)에는 “장옥진, 강북지수, 호 영창릉(葬玉珍, 江北之水, 號 永昌陵, 즉 옥진을 강북에 장사지내고, 그 릉을 영창릉이라 하였다)”이라고 쓰고 있고, 양학가의 명씨실록에는 “장강북 영창릉(葬江北 永昌陵, 즉 강북 영창릉에 장사지냈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여러 역사학자들과 문물학자들이 그곳을 밝혀내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한편 여러 차례 발간된 우리 한국 명씨의 과거 족보에도 영창릉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시조 황제 릉의 정확한 위치나 자세한 장례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찾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3월 30일 중국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있던 중경 직조 공장의 확장 공사를 하던 중에 시조의 릉이 발견되었다. 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공사장에서는 다음날 릉 속에 있던 곽(槨, 관을 담은 궤) 전반부를 부수고 내관을 열었다. 안에서는 비단으로 된 몇 점의 의복들과 작은 황금술잔 한 개, 그리고 은피 2개를 발견하였다.

이어 4월 1일 계속 공사를 하면서 비석과 비석 윗부분에 새겨진 5줄의 문자가 보여 졌다.

당시 중경시 박물관 측은 전문직 직원을 두 번이나 이곳에 보냈으나 그들은 이 릉을 보통의 청나라 시대 고분으로 판단함으로써 출토된 관곽, 비단 사직품(絲織品), 황금술잔, 은괴 외에도 많았을 릉 속의 부장품이 유실되는 안타까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4월 6일 저녁 때 쯤에는 비석 전체가 출토되어 완벽한 비문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비문을 통하여 이 고분이 우리의 명씨시조인 대하국 명옥진 황제의 예릉(叡陵)으로 확인되었다.

이때 비로소 관계부처와 전문가들이 이를 중시하고 많은 박물관 인력을 투입하여 4월 8일부터 흩어진 유물들을 회수하였으며, 릉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정식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0여 일간의 긴장된 작업과정을 거쳐 4월 18일 예릉 발굴작업을 모두 마쳤다.

 

예릉은 원래 강북현(江北縣) 성내 북변(城內 北邊), 즉 지금의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있었다. 강북현은 청(淸) 도광(道光) 13년(1833년)에 설치되었고, 이 지역은 가능강과 양자강이 합류되는 곳이다. 성 북쪽은 보개산(寶蓋山)으로 해발 261미터이며, 산 정상에는 명(明) 무종 정덕 7년(1513년)에 익양(弋陽) 관망대가 세워졌다. 릉의 뒤쪽은 보개산이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양자강, 남쪽은 가능강이 있어서 옛날 그 당시 릉에서 앞을 내려다보면 대단히 넓은 장관의 경치를 볼 수 있었을 곳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보개산 아래는 밭이 되었고 간간이 묘의 릉들이 남아 있었다.

예릉의 위치는 산 중간언덕 동남쪽 세포당(洗布塘洗) 서북-동남방향(西北-東南方向)으로 남쪽에서 동쪽으로 41도 치우쳐진 곳에 있다.

중경시가 해방된 후 이 일대는 공장 지대가 되었고 주변에는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인구 밀집 지역으로 밭은 오래 전에 없어졌다.

2000년 들어서 중경시는 예릉 주변의 민가와 공장들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운 상업중심지대로 개발하고 있으나, 예릉은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물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현궁지비 실물(중경 삼협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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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시조 대하국 명옥진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현궁지비의 실물 모습.

이 실물 현궁지비는 현재 중경의 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석의 우측 상단부분이 발굴의 영향 때문인지 다소 손상되어 있으나 손상된 부분의 아래로 보여지는 용의 형태로 미루어 좌측 용문양이 대칭으로 새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상된 부분을 좌측과 대칭으로 새겨 넣은 실물 복각 현궁지비는 파주사당과 지방사당에 세워져 있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황금술잔과 은괴

 

시조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황금 술잔과 은제 그릇.

예릉에서 발굴된 황금 술잔과 은괴, 즉 은 덩어리의 실물은 현재 중경 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중경 명옥진 황제기념관과 수주 탄생지기념관에도 실물의 모습을 재현한 복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발굴된 황금 술잔의 윗부분은 밖으로 기울어져 있고, 내 병은 호형(孤形)으로 밑바닥에는 “連盤 西兩七錢半, 元” 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중량은 56g, 윗변 둘레 8.1cm, 깊이는 2.5cm, 밑바닥 직경은 5.5cm이다.

은괴(銀塊), 즉 은 덩어리는 2개가 나왔는데, 2개 모두 앞, 뒤 부분은 조금 넓고 중간은 약간 가는 그릇 모양이다. 표면은 조금 거칠고 뒷면은 평평하며 많은 작은 구멍들이 있다. 큰 것은 131g이고, 길이는 6cm, 앞뒤 폭은 3.8cm이다. 작은 73.5g, 길이는 4.3cm, 앞뒤 폭은 3.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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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인 시조황제의 황금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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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황제의 황금술잔과 은피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시조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

곤룡포에는 발가락이 다섯 개인 용의 모습이 비단실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황제의 신분임을 증명한다.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 실물은 현재 중경 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중경 명옥진 황제릉 기념관에도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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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인 시조황제의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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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위진 대종회장(당시 부회장)이 곤룡포를 직접 들어 보이고 있다.

옷의 크기로 미루어 키가 8척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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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위진 회장과 당시 통역을 맡았던 한진극 교수가 곤룡포에 대해

중국인민정부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용문양

 

시조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곤룡포 참조).

십이지신 중 하나인 용은 실존하는 여러 가지 동물의 특징을 모두 넣어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상서로운 동물로서 황제나 왕을 상징해왔다. 용이 하늘과 바다를 지배하는 것처럼 황제나 왕의 지위와 권력이 높기 때문인데,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부르고, 의복을 곤룡포라고 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용 발톱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고조 때는 제왕과 첫째와 둘째 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었다. 중국에서 황제만이 발가락이 5개인 용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조 황제께서 입으셨던 곤룡포의 용문양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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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외 그 밖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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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은 주요 비단 산지. 고대에 사천을 ‘촉(蜀)’이라 부른 것은 양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도(成都)는 사천성(四川省)의 성도(省都)이며, 그 남쪽에 금성이라는 곳이 비단으로 매우 유명했다. 사천은 분지이기 때문에 습기가 많아서 방직물을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현존하는 실물들은 많지 않다. 예릉에서 출토된 직물이 귀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릉에서 출토된 그 밖의 유물은 다음과 같다.

 

● 명기(明器, 장사지낼 때 무덤에 묻는 기물)

* 적황사문(赤黃斜紋) 비단 명정(銘旌)

명정(銘旌)은 명정(明施) 혹은 신백(神帛)이라고도 부른다. 그 길이는 230cm, 폭은 63cm이고, 위에서 180cm 이하 부분은 반폭으로 되어있어 나머지 반폭은 어떻게 손실되었는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 신백은 관 뚜껑 위에 덮여 있었다.

* 담황운봉문(淡黃雲鳳紋) 비단 화폭(畵幅)

길이는 224cm, 폭은 54cm이고, 그림 내용은 상서로운 구름이 해와 달을 받쳐 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명옥진 황제가 명교를 믿었고, 또 명교가 ‘마니’(3세기 때 페르시아 사람으로 배화교를 바탕으로 마니교를 창설 한 사람)를 광명의 신으로 숭상하며 해와 달을 숭배한 것과 관계가 있다.

윗부분 세 곳, 아랫부분의 두 곳이 이 떨어져나갔으나 곽 안에 떨어진 조각들을 붙여서 원형을 복원했다.

관 뚜껑 위에 그것을 덮은 것은 고대의 비의(菲衣)와 같이 죽은 자의 영혼이 그것을 통하여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 담황(淡黃) 꽃무늬가 있는 명피(明被, 이불감)

명피(明被)는 고대에는 금(衾)이라고 불렀으며, 황제의 몸을 감싸는데 필요한 필수품이다. 폭85cm, 길이 176cm이며, 연문(蓮紋)으로 짜여있다.

* 단황운봉만보문(丹黃雲鳳萬寶紋) 비단 이불감

일부 파손되어 남아있는 것의 길이는 166cm, 폭 57cm로, 그 위에는 운봉, 만자, 원보, 성두(雲鳳, 萬字, 元寶, 星斗) 등의 무늬로 짜여있다. 너무 많이 훼손되어 있어 원상태 복구가 불가능하였다.

* 단황색 만자(丹黃色 萬字)를 자수(刺繡)한 비단 잔재품

조각은 크고 작은 것 모두 8개였는데 제일 큰 조각의 길이는 39cm, 폭 쪽으로의 면은 물에 잠겨 오염이 심하였다. 만자 도안의 자수무늬는 매우 정밀했다. 이것은 원대의 사직(絲織)공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 단황(丹黃) 비단 직물편(織物片)

용도는 불분명하지만 조각의 길이는 70cm, 폭은 58cm이고 그 위에는 비의(菲衣)의 도화가 있고 침수의 흔적이 있다. 이 견직품은 내의의 한 부분인데 다른 색으로 자수한 꽃무늬는 원명(元明)이전에 많이 유행한 직조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 단황 비단 요

큰 주머니 같은 형태로 모두 4개이다. 색깔과 품질은 모두 비슷하다. 그 앞면은 단황 꽃무늬가 있는 비단이며, 뒷면은 가는 실로 짠 비단 안 솜을 넣었다 길이 152 - 165cm, 폭은 49-55cm이고, 표면은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원상태로 수선 복원되었다.

 

● 도포(道袍)

* 청() 비단 도포(道袍)

원래의 도포는 출토 시 내관 위에 덮여 있었는데 꺼내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수선 후 길이 137cm, 어깨와 소매길이 202cm, 허리폭 93cm, 소매둘레 33cm가 되었고 어깨에 곤룡 무늬 자수가 있다. 곤룡 무늬 자수는 옛날부터 황제나 상공들의 예복으로 쓰였다.

시조께서 황제가 된 후 대하국의 제도는 대부분 송, 원 시대를 따른 것이었으나 검소했다. 도포에 자수된 용무늬는 과거에는 매우 복잡했으나 출토된 황제의 도포는 많은 것을 생략한 것이었다. 명옥진 시조황제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 단황 비단 곤룡포(衰龍袍)

모두 두벌이 있는데 그 중 한 벌은 큰 손상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 길이는 137cm, 어깨와 소매 길이는 226cm, 허리폭은 103cm이다. 가슴과 그 뒤에는 각각 곤룡이 자수된 도안이 있다. 다른 한 벌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태로 회복할 수 없어 지금 훼손된 상태로 있다. 그

뒤에는 용무늬가 자수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적황 비단 곤룡포

이 옷의 길이는 132cm, 어깨와 소매길이는 244cm이고 허리폭은 100cm, 소매둘레는 30cm, 가슴과 등에는 각각 곤룡이 자수되어 있고 오른쪽 옷섶과 소매가 흠결되어 있으나 대체적으로 완전하다. 이것은 황제의 일상 정복이다.

* 담황운룡문의 비단 속옷

옷 길이는 130.1cm, 어깨와 소매 길이는 246cm, 몸통 폭은 91cm, 소매둘레는 26cm이다.

옛적에는 ‘습삼(褶衫)’이라고 하던 정복이 아닌 황제께서 잠옷으로 입었던 것이다.

* 단황 비단 유군(襦裙)

모두 두벌이 있었는데, 하나의 길이는 119cm, 어깨와 소매길이는 218cm, 소매둘레는 15cm이고 위 부분은 저고리이고 아래 부분은 치마이다. 오늘날의 원피스 같은 것이다. 다른 한 벌도 모양은 같다. 길이 127cm, 어깨와 소매 길이 220cm, 소매 둘레는 15cm이다. 고대에는 저고리와 치마는 연결되지 않았었다. 대략 당송시대부터 두루마기 복장이 등장하였다. 대하국의 제도는 대부분 송의 것을 따랐던 바, 이 복장도 그 하나의 실례이다.

* 비단 폐슬(蔽膝, 솜옷명)의 잔여품

위 부분이 없어진 상태의 잔여 길이는 102cm, 아랫부분은 완전하다. 겉은 단황 비단, 안은 무색이며, 명주솜을 안에 넣은 것인데 지금의 오버코트와 같다. 이런 복장을 옛날에는 폐슬이라 하였다. 윗부분이 훼손되어 확실한 원형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 의료(衣料)

정폭(整幅)의 견직품을 순장한 일은 서한초(西漢初)의 장사(長沙, 호남성 성도)에서 발굴된 마왕퇴 일호 묘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명옥진 시조황제의 능에서 출토된 정폭 견직품은 십여 폭이다. 출토된 견직품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된다.

* 적황운문도포(赤黃雲紋道砲) 옷감

남아있는 것은 길이 166cm, 폭 53cm의 3폭이었는데, 그 중 1폭의 하단에는 여의, 운두(如意, 雲頭)의 도안이 자수되어 있다. 이것은 원, 명(元, 明) 양대 견직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 적황사문 비단 도포 옷감, 7폭

이것은 관곽사이 곁채 내에 있었다. 그 폭은 58.5cm이고 길이는 모두 같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부분적인 훼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옷감 끝에는 ‘상구(常口)’라는 장방형 압인이 찍혀 있다. 이것은 제작자의 성씨로 보인다. 상씨는 사천 숭경현의 거성(巨姓)이다. 이 견직품은 성도 부근의 주와 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청색 비단 도포 옷감, 6폭

이 옷감들 역시 관곽 사이에 있었다. 지하에 매장된 채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크게 손상되어서 정확한 길이는 측정할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것의 길이는 295cm, 폭은 57cm로 관내의 습기로 인해 청색이 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상 발굴된 견직품들 중 수선되어 원형으로 회복된 명기들은 모두 9점이었고, 도포, 치마 등은 7점, 의류 14점이었으며, 작은 조각으로 나뉜 훼손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명기들의 모양, 컬러, 무늬들은 릉의 주인인 시조 황제의 신분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중요한 증거물이었다.

릉에서 나온 견직물들은 1336년 이전에 사천지방에서 제조된 것으로 사천 지역의 원대(元代) 방직공업에 대한 연구에 매우 진귀한 실물자료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 명옥진 황제 대하국 도장

 

시조 명옥진 황제 대하국이 사용한 도장 모습. 현재 중경의 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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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대하국 화페

 

시조 명옥진 황제 대하국의 화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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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곽과 관

 

명씨시조 대하국 태조 명옥진 황제 예릉 석실은 장방형이다. 동서방향으로의 길이는 4.5m, 남북으로의 폭은 3.5m이다. 릉의 상부는 모래, 자갈층으로 되어 있고 하부는 매우 견고한 암석층으로 되어 있다. 산세는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묘혈(墓穴) 암석층(岩石層) 앞쪽은 알고, 뒷부분은 깊은 형태로 앞 벽 높이는 2m, 뒷벽 높이는 3.2m이고, 현실(玄室)앞 묘도(墓道)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릉의 원 통로가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당시 공사로 인해 크게 파헤쳐짐으로써 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릉의 묘혈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고, 아래로부터 윗부분까지 9층으로 되어 있었다.

밑바닥 1층은 약 10cm 두께의 굵은 목탄 층으로 되어 있었고, 원형 목탄봉의 직경은 10cm로 릉의 밑부분에 깔려 있었다. 목탄은 사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청두수(靑社樹)를 구어 만든 품질 좋은 것으로 출토 시에도 매우 완벽한 상태였다.

제2층은 삼합토층이었다. 이층은 관곽(棺槨)의 대부분을 덮고 있고 두께 110cm로 돌과 같이 단단한 증이었다.

제3층 역시 삼합토층으로 두께는 60cm이었으며 약간의 석회가 섞여 있었고 모래와 자갈이 많아 제2층보다는 단단하지 못하였다.

제4층은 부스러진 목탄 층으로 두께는 5cm이었다.

제5층은 모래와 강 자갈층이었는데 두께 50cm로 모래와 흙 및 계란 크기의 강자갈을 섞어서 깔아놓은 것이었다.

제6층은 제4층과 같이 부스러진 목단 층으로 되어 있었다.

제7층은 5층과 같이 모래흙과 강자갈을 뒤섞은 것이었는데 두께는 20cm였다.

제8층은 굵단 목단 층이었는데 목탄의 질과 두께는 제1층과 비슷하였다.

묘혈의 맨 윗부분, 즉 제9층은 여러 가지 색깔의 흙으로 두께는 50cm이었다.

릉에서 출토된 장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곽은 향비목(香榧木)으로 제작된 것으로서 목질이 잘 부식되지 않는 재질이어서 출토된 후에도 여전히 향기가 있었다.

곽의 형태는 윗부분은 좁고 밑 부분은 넓은 모습이다. 앞부분은 크고 뒤 부분은 작은데, 곽구(槨口)와 뚜껑 판은 S자형으로 서로 끼워 맞추고 뚜껑을 꼭 맞게 덮었다. 그리고 주변은 또 다시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나머지 5개의 곽판(樹板)이 물리는 부분은 모두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좌우벽판(左右壁板)은 통나무로 제작하였는데 두께는 8-10-8cm이다. 외형은 약간 안쪽으로 굽은 내호형(內孤形)으로 양쪽 끝은 凹형으로 되어 있고 하단 양쪽에는 직경 10cm의 철환이 있어 관곽을 땅속에 넣을 때에 끈으로 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후의 목판은 벽판은 凹형에 맞물리게 되어 있고, 벽판 양쪽은 목판 밖으로 조금 나와 있다.

밑판은 길이가 284cm이고, 앞부분 폭은 127cm, 뒷부분 폭은 110cm이다.

뚜껑은 약간 굽은 호형(孤形)이고 두께는 13cm이다. 곽 앞부분 높이는 135cm이고 뒷부분 높이는 115cm이다. 곽판 표면은 도료(塗料)가 칠해져 있고, 뚜껑판에는 꽃잎 모양의 조각이 있다.

내관은 잣나무(相水)로 되어 있고, 그 구조와 형태는 곽과 비슷하다. 크기는 곽보다 조금 작고, 곽내(槨內)에 관 밑 부분보다 조금 큰 시렁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관좌(棺座) 주위에는 폭 11cm, 두께 6.5cm의 목재들이 있었다. 관판 두께는 9.5cm이고 판과 판은 나무못으로 접촉 시켜 틈 사이는 도료(塗料)와 마포(麻布)를 섞어서 붙였다. 주변은 철못으로 고정시켰고 그 관 윗부분은 호형(孤形)으로 앞과 중간의 높이 69cm, 위 폭은 65cm, 아래 폭은 72cm, 뒤 윗부분 폭은 57cm, 뒤 밑부분 폭은 63cm이다. 뚜껑은 약간 호형(孤形)으로 양쪽 변 길이는 234cm, 중간 길이는 256cm이고, 관 밑판은 평평하고, 길이는 256cm, 앞부분은 폭은 86cm, 뒷부분 폭은 24cm, 관 앞 높이는 84cm, 뒷부분 높이는 70cm이고, 모두 붉은 칠을 하였다.

발굴 시에 나무 판 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출토 중 파손되어 원상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곽 앞 36cm 되는 곳에 장방형 석갱(石坑)이 있는데, 구멍의 깊이는 25cm, 길이는 47cm, 폭은 41cm였다. 여기가 현궁지비(玄宮之碑)를 세운 곳이다. 현궁지비는 약간 푸른색이 나는 동석(茼石)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 높이는 145cm, 폭은 57cm, 두께는 23.5cm이다.

릉의 발견과 개관 당시의 상황은 기록도 하지 않았고 또 본 박물관 직원들의 실수로 관내의 물품, 종류, 수량, 위치 등 릉의 원형을 정확하게 찾을 수 없게 됨으로써, 그 역사적인 연구에 어려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 당시와 개관시 목격자들과 광안당국 및 문학간 직원들이 당시 상황을 알려줌으로 써 어느 정도 불충분한 점들을 보충할 수 있었다.

발굴 당시 상황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곽 밑바닥은 진흙물이 고여 있었고, 관내는 열은 녹색 물이 조금 잠겨 있었으며 냄새도 있었다. 내관 뚜껑 위에는 파란 의복 한 벌이 덮여 있었고, 그 속에는 사직물 등이 들어 있었다.

곽 밑판과 곽 사이에는 비단 직물들이 있었는데, 개관 시 관안에서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고, 왕관, 바지, 신발, 버선 등의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주시해봐야 할 점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예릉의 규모는 크지 않고 소박했으며 출토된 기물들도 비교적 많지 않았으나, 비단 직물들이 좀 많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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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릉 현판 모습(초기)

 

중국 중경, 시조 황제의 예릉 초기 현판 모습이다.

현판 서각의 글자체는 최근의 것과 동일하나, 우측에 ‘徐文彬’(서문빈)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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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릉 현판 모습(최근)

 

sub2_03-16.jpg중국 중경, 시조 황제의 예릉 최근 현판 모습이다. 초기의 현판과 비교해보면 글자체는 같지만, 우측의 ‘徐文彬’(서문빈)이라는 글자가 없다.

 

 

 ▣ 명옥진 황제 예릉발견 경위 및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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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옥진 황제와 그 묘장연구’에 나와 있는 황제릉 발굴당시의 모습

명씨시조 대하국 태조, 흠문소무 명옥진 황제께서는 과거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1366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에 대해 명사, 명옥진전(明史, 明玉珍傳)에는 “장옥진, 강북지수, 호 영창릉(葬玉珍, 江北之水, 號 永昌陵, 즉 옥진을 강북에 장사지내고, 그 릉을 영창릉이라 하였다)”이라고 쓰고 있고, 양학가의 명씨실록에는 “장강북 영창릉(葬江北 永昌陵, 즉 강북 영창릉에 장사지냈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의 여러 역사학자들과 문물학자들이 그곳을 밝혀내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한편 여러 차례 발간된 우리 한국 명씨의 과거 족보에도 영창릉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시조 황제 릉의 정확한 위치나 자세한 장례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찾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6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3월 30일 중국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있던 중경 직조 공장의 확장 공사를 하던 중에 시조의 릉이 발견되었다. 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공사장에서는 다음날 릉 속에 있던 곽(槨, 관을 담은 궤) 전반부를 부수고 내관을 열었다. 안에서는 비단으로 된 몇 점의 의복들과 작은 황금술잔 한 개, 그리고 은피 2개를 발견하였다.

이어 4월 1일 계속 공사를 하면서 비석과 비석 윗부분에 새겨진 5줄의 문자가 보여 졌다.

당시 중경시 박물관 측은 전문직 직원을 두 번이나 이곳에 보냈으나 그들은 이 릉을 보통의 청나라 시대 고분으로 판단함으로써 출토된 관곽, 비단 사직품(絲織品), 황금술잔, 은괴 외에도 많았을 릉 속의 부장품이 유실되는 안타까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4월 6일 저녁 때 쯤에는 비석 전체가 출토되어 완벽한 비문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비문을 통하여 이 고분이 우리의 명씨시조인 대하국 명옥진 황제의 예릉(叡陵)으로 확인되었다.

이때 비로소 관계부처와 전문가들이 이를 중시하고 많은 박물관 인력을 투입하여 4월 8일부터 흩어진 유물들을 회수하였으며, 릉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 정식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10여 일간의 긴장된 작업과정을 거쳐 4월 18일 예릉 발굴작업을 모두 마쳤다.

 

예릉은 원래 강북현(江北縣) 성내 북변(城內 北邊), 즉 지금의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있었다. 강북현은 청(淸) 도광(道光) 13년(1833년)에 설치되었고, 이 지역은 가능강과 양자강이 합류되는 곳이다. 성 북쪽은 보개산(寶蓋山)으로 해발 261미터이며, 산 정상에는 명(明) 무종 정덕 7년(1513년)에 익양(弋陽) 관망대가 세워졌다. 릉의 뒤쪽은 보개산이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양자강, 남쪽은 가능강이 있어서 옛날 그 당시 릉에서 앞을 내려다보면 대단히 넓은 장관의 경치를 볼 수 있었을 곳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보개산 아래는 밭이 되었고 간간이 묘의 릉들이 남아 있었다.

예릉의 위치는 산 중간언덕 동남쪽 세포당(洗布塘洗) 서북-동남방향(西北-東南方向)으로 남쪽에서 동쪽으로 41도 치우쳐진 곳에 있다.

중경시가 해방된 후 이 일대는 공장 지대가 되었고 주변에는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인구 밀집 지역으로 밭은 오래 전에 없어졌다.

2000년 들어서 중경시는 예릉 주변의 민가와 공장들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운 상업중심지대로 개발하고 있으나, 예릉은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물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현궁지비 실물(중경 삼협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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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시조 대하국 명옥진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현궁지비의 실물 모습.

이 실물 현궁지비는 현재 중경의 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석의 우측 상단부분이 발굴의 영향 때문인지 다소 손상되어 있으나 손상된 부분의 아래로 보여지는 용의 형태로 미루어 좌측 용문양이 대칭으로 새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상된 부분을 좌측과 대칭으로 새겨 넣은 실물 복각 현궁지비는 파주사당과 지방사당에 세워져 있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황금술잔과 은괴

 

시조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황금 술잔과 은제 그릇.

예릉에서 발굴된 황금 술잔과 은괴, 즉 은 덩어리의 실물은 현재 중경 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중경 명옥진 황제기념관과 수주 탄생지기념관에도 실물의 모습을 재현한 복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발굴된 황금 술잔의 윗부분은 밖으로 기울어져 있고, 내 병은 호형(孤形)으로 밑바닥에는 “連盤 西兩七錢半, 元” 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중량은 56g, 윗변 둘레 8.1cm, 깊이는 2.5cm, 밑바닥 직경은 5.5cm이다.

은괴(銀塊), 즉 은 덩어리는 2개가 나왔는데, 2개 모두 앞, 뒤 부분은 조금 넓고 중간은 약간 가는 그릇 모양이다. 표면은 조금 거칠고 뒷면은 평평하며 많은 작은 구멍들이 있다. 큰 것은 131g이고, 길이는 6cm, 앞뒤 폭은 3.8cm이다. 작은 73.5g, 길이는 4.3cm, 앞뒤 폭은 3.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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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인 시조황제의 황금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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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황제의 황금술잔과 은피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시조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

곤룡포에는 발가락이 다섯 개인 용의 모습이 비단실로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황제의 신분임을 증명한다.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 실물은 현재 중경 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이며, 중경 명옥진 황제릉 기념관에도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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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협박물관에 전시 중인 시조황제의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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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위진 대종회장(당시 부회장)이 곤룡포를 직접 들어 보이고 있다.

옷의 크기로 미루어 키가 8척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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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위진 회장과 당시 통역을 맡았던 한진극 교수가 곤룡포에 대해

중국인민정부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용문양

 

시조 황제의 예릉에서 출토된 곤룡포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을 가진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곤룡포 참조).

십이지신 중 하나인 용은 실존하는 여러 가지 동물의 특징을 모두 넣어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상서로운 동물로서 황제나 왕을 상징해왔다. 용이 하늘과 바다를 지배하는 것처럼 황제나 왕의 지위와 권력이 높기 때문인데,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부르고, 의복을 곤룡포라고 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용 발톱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고조 때는 제왕과 첫째와 둘째 왕자만이 다섯 발가락의 용을 쓸 수 있었다. 중국에서 황제만이 발가락이 5개인 용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조 황제께서 입으셨던 곤룡포의 용문양에는 다섯 개의 발가락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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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곤룡포 외 그 밖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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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은 주요 비단 산지. 고대에 사천을 ‘촉(蜀)’이라 부른 것은 양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도(成都)는 사천성(四川省)의 성도(省都)이며, 그 남쪽에 금성이라는 곳이 비단으로 매우 유명했다. 사천은 분지이기 때문에 습기가 많아서 방직물을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현존하는 실물들은 많지 않다. 예릉에서 출토된 직물이 귀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릉에서 출토된 그 밖의 유물은 다음과 같다.

 

● 명기(明器, 장사지낼 때 무덤에 묻는 기물)

* 적황사문(赤黃斜紋) 비단 명정(銘旌)

명정(銘旌)은 명정(明施) 혹은 신백(神帛)이라고도 부른다. 그 길이는 230cm, 폭은 63cm이고, 위에서 180cm 이하 부분은 반폭으로 되어있어 나머지 반폭은 어떻게 손실되었는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이 신백은 관 뚜껑 위에 덮여 있었다.

* 담황운봉문(淡黃雲鳳紋) 비단 화폭(畵幅)

길이는 224cm, 폭은 54cm이고, 그림 내용은 상서로운 구름이 해와 달을 받쳐 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명옥진 황제가 명교를 믿었고, 또 명교가 ‘마니’(3세기 때 페르시아 사람으로 배화교를 바탕으로 마니교를 창설 한 사람)를 광명의 신으로 숭상하며 해와 달을 숭배한 것과 관계가 있다.

윗부분 세 곳, 아랫부분의 두 곳이 이 떨어져나갔으나 곽 안에 떨어진 조각들을 붙여서 원형을 복원했다.

관 뚜껑 위에 그것을 덮은 것은 고대의 비의(菲衣)와 같이 죽은 자의 영혼이 그것을 통하여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 담황(淡黃) 꽃무늬가 있는 명피(明被, 이불감)

명피(明被)는 고대에는 금(衾)이라고 불렀으며, 황제의 몸을 감싸는데 필요한 필수품이다. 폭85cm, 길이 176cm이며, 연문(蓮紋)으로 짜여있다.

* 단황운봉만보문(丹黃雲鳳萬寶紋) 비단 이불감

일부 파손되어 남아있는 것의 길이는 166cm, 폭 57cm로, 그 위에는 운봉, 만자, 원보, 성두(雲鳳, 萬字, 元寶, 星斗) 등의 무늬로 짜여있다. 너무 많이 훼손되어 있어 원상태 복구가 불가능하였다.

* 단황색 만자(丹黃色 萬字)를 자수(刺繡)한 비단 잔재품

조각은 크고 작은 것 모두 8개였는데 제일 큰 조각의 길이는 39cm, 폭 쪽으로의 면은 물에 잠겨 오염이 심하였다. 만자 도안의 자수무늬는 매우 정밀했다. 이것은 원대의 사직(絲織)공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 단황(丹黃) 비단 직물편(織物片)

용도는 불분명하지만 조각의 길이는 70cm, 폭은 58cm이고 그 위에는 비의(菲衣)의 도화가 있고 침수의 흔적이 있다. 이 견직품은 내의의 한 부분인데 다른 색으로 자수한 꽃무늬는 원명(元明)이전에 많이 유행한 직조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 단황 비단 요

큰 주머니 같은 형태로 모두 4개이다. 색깔과 품질은 모두 비슷하다. 그 앞면은 단황 꽃무늬가 있는 비단이며, 뒷면은 가는 실로 짠 비단 안 솜을 넣었다 길이 152 - 165cm, 폭은 49-55cm이고, 표면은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원상태로 수선 복원되었다.

 

● 도포(道袍)

* 청() 비단 도포(道袍)

원래의 도포는 출토 시 내관 위에 덮여 있었는데 꺼내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수선 후 길이 137cm, 어깨와 소매길이 202cm, 허리폭 93cm, 소매둘레 33cm가 되었고 어깨에 곤룡 무늬 자수가 있다. 곤룡 무늬 자수는 옛날부터 황제나 상공들의 예복으로 쓰였다.

시조께서 황제가 된 후 대하국의 제도는 대부분 송, 원 시대를 따른 것이었으나 검소했다. 도포에 자수된 용무늬는 과거에는 매우 복잡했으나 출토된 황제의 도포는 많은 것을 생략한 것이었다. 명옥진 시조황제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 단황 비단 곤룡포(衰龍袍)

모두 두벌이 있는데 그 중 한 벌은 큰 손상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 길이는 137cm, 어깨와 소매 길이는 226cm, 허리폭은 103cm이다. 가슴과 그 뒤에는 각각 곤룡이 자수된 도안이 있다. 다른 한 벌은 훼손이 심하여 원상태로 회복할 수 없어 지금 훼손된 상태로 있다. 그

뒤에는 용무늬가 자수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적황 비단 곤룡포

이 옷의 길이는 132cm, 어깨와 소매길이는 244cm이고 허리폭은 100cm, 소매둘레는 30cm, 가슴과 등에는 각각 곤룡이 자수되어 있고 오른쪽 옷섶과 소매가 흠결되어 있으나 대체적으로 완전하다. 이것은 황제의 일상 정복이다.

* 담황운룡문의 비단 속옷

옷 길이는 130.1cm, 어깨와 소매 길이는 246cm, 몸통 폭은 91cm, 소매둘레는 26cm이다.

옛적에는 ‘습삼(褶衫)’이라고 하던 정복이 아닌 황제께서 잠옷으로 입었던 것이다.

* 단황 비단 유군(襦裙)

모두 두벌이 있었는데, 하나의 길이는 119cm, 어깨와 소매길이는 218cm, 소매둘레는 15cm이고 위 부분은 저고리이고 아래 부분은 치마이다. 오늘날의 원피스 같은 것이다. 다른 한 벌도 모양은 같다. 길이 127cm, 어깨와 소매 길이 220cm, 소매 둘레는 15cm이다. 고대에는 저고리와 치마는 연결되지 않았었다. 대략 당송시대부터 두루마기 복장이 등장하였다. 대하국의 제도는 대부분 송의 것을 따랐던 바, 이 복장도 그 하나의 실례이다.

* 비단 폐슬(蔽膝, 솜옷명)의 잔여품

위 부분이 없어진 상태의 잔여 길이는 102cm, 아랫부분은 완전하다. 겉은 단황 비단, 안은 무색이며, 명주솜을 안에 넣은 것인데 지금의 오버코트와 같다. 이런 복장을 옛날에는 폐슬이라 하였다. 윗부분이 훼손되어 확실한 원형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 의료(衣料)

정폭(整幅)의 견직품을 순장한 일은 서한초(西漢初)의 장사(長沙, 호남성 성도)에서 발굴된 마왕퇴 일호 묘에서 발견한 적이 있다.

명옥진 시조황제의 능에서 출토된 정폭 견직품은 십여 폭이다. 출토된 견직품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된다.

* 적황운문도포(赤黃雲紋道砲) 옷감

남아있는 것은 길이 166cm, 폭 53cm의 3폭이었는데, 그 중 1폭의 하단에는 여의, 운두(如意, 雲頭)의 도안이 자수되어 있다. 이것은 원, 명(元, 明) 양대 견직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 적황사문 비단 도포 옷감, 7폭

이것은 관곽사이 곁채 내에 있었다. 그 폭은 58.5cm이고 길이는 모두 같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부분적인 훼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옷감 끝에는 ‘상구(常口)’라는 장방형 압인이 찍혀 있다. 이것은 제작자의 성씨로 보인다. 상씨는 사천 숭경현의 거성(巨姓)이다. 이 견직품은 성도 부근의 주와 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청색 비단 도포 옷감, 6폭

이 옷감들 역시 관곽 사이에 있었다. 지하에 매장된 채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크게 손상되어서 정확한 길이는 측정할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것의 길이는 295cm, 폭은 57cm로 관내의 습기로 인해 청색이 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상 발굴된 견직품들 중 수선되어 원형으로 회복된 명기들은 모두 9점이었고, 도포, 치마 등은 7점, 의류 14점이었으며, 작은 조각으로 나뉜 훼손된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명기들의 모양, 컬러, 무늬들은 릉의 주인인 시조 황제의 신분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중요한 증거물이었다.

릉에서 나온 견직물들은 1336년 이전에 사천지방에서 제조된 것으로 사천 지역의 원대(元代) 방직공업에 대한 연구에 매우 진귀한 실물자료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 명옥진 황제 대하국 도장

 

시조 명옥진 황제 대하국이 사용한 도장 모습. 현재 중경의 삼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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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대하국 화페

 

시조 명옥진 황제 대하국의 화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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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 예릉출토 곽과 관

 

명씨시조 대하국 태조 명옥진 황제 예릉 석실은 장방형이다. 동서방향으로의 길이는 4.5m, 남북으로의 폭은 3.5m이다. 릉의 상부는 모래, 자갈층으로 되어 있고 하부는 매우 견고한 암석층으로 되어 있다. 산세는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묘혈(墓穴) 암석층(岩石層) 앞쪽은 알고, 뒷부분은 깊은 형태로 앞 벽 높이는 2m, 뒷벽 높이는 3.2m이고, 현실(玄室)앞 묘도(墓道)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릉의 원 통로가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당시 공사로 인해 크게 파헤쳐짐으로써 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릉의 묘혈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고, 아래로부터 윗부분까지 9층으로 되어 있었다.

밑바닥 1층은 약 10cm 두께의 굵은 목탄 층으로 되어 있었고, 원형 목탄봉의 직경은 10cm로 릉의 밑부분에 깔려 있었다. 목탄은 사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청두수(靑社樹)를 구어 만든 품질 좋은 것으로 출토 시에도 매우 완벽한 상태였다.

제2층은 삼합토층이었다. 이층은 관곽(棺槨)의 대부분을 덮고 있고 두께 110cm로 돌과 같이 단단한 증이었다.

제3층 역시 삼합토층으로 두께는 60cm이었으며 약간의 석회가 섞여 있었고 모래와 자갈이 많아 제2층보다는 단단하지 못하였다.

제4층은 부스러진 목탄 층으로 두께는 5cm이었다.

제5층은 모래와 강 자갈층이었는데 두께 50cm로 모래와 흙 및 계란 크기의 강자갈을 섞어서 깔아놓은 것이었다.

제6층은 제4층과 같이 부스러진 목단 층으로 되어 있었다.

제7층은 5층과 같이 모래흙과 강자갈을 뒤섞은 것이었는데 두께는 20cm였다.

제8층은 굵단 목단 층이었는데 목탄의 질과 두께는 제1층과 비슷하였다.

묘혈의 맨 윗부분, 즉 제9층은 여러 가지 색깔의 흙으로 두께는 50cm이었다.

릉에서 출토된 장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곽은 향비목(香榧木)으로 제작된 것으로서 목질이 잘 부식되지 않는 재질이어서 출토된 후에도 여전히 향기가 있었다.

곽의 형태는 윗부분은 좁고 밑 부분은 넓은 모습이다. 앞부분은 크고 뒤 부분은 작은데, 곽구(槨口)와 뚜껑 판은 S자형으로 서로 끼워 맞추고 뚜껑을 꼭 맞게 덮었다. 그리고 주변은 또 다시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나머지 5개의 곽판(樹板)이 물리는 부분은 모두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좌우벽판(左右壁板)은 통나무로 제작하였는데 두께는 8-10-8cm이다. 외형은 약간 안쪽으로 굽은 내호형(內孤形)으로 양쪽 끝은 凹형으로 되어 있고 하단 양쪽에는 직경 10cm의 철환이 있어 관곽을 땅속에 넣을 때에 끈으로 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후의 목판은 벽판은 凹형에 맞물리게 되어 있고, 벽판 양쪽은 목판 밖으로 조금 나와 있다.

밑판은 길이가 284cm이고, 앞부분 폭은 127cm, 뒷부분 폭은 110cm이다.

뚜껑은 약간 굽은 호형(孤形)이고 두께는 13cm이다. 곽 앞부분 높이는 135cm이고 뒷부분 높이는 115cm이다. 곽판 표면은 도료(塗料)가 칠해져 있고, 뚜껑판에는 꽃잎 모양의 조각이 있다.

내관은 잣나무(相水)로 되어 있고, 그 구조와 형태는 곽과 비슷하다. 크기는 곽보다 조금 작고, 곽내(槨內)에 관 밑 부분보다 조금 큰 시렁 위에 안치되어 있었다. 관좌(棺座) 주위에는 폭 11cm, 두께 6.5cm의 목재들이 있었다. 관판 두께는 9.5cm이고 판과 판은 나무못으로 접촉 시켜 틈 사이는 도료(塗料)와 마포(麻布)를 섞어서 붙였다. 주변은 철못으로 고정시켰고 그 관 윗부분은 호형(孤形)으로 앞과 중간의 높이 69cm, 위 폭은 65cm, 아래 폭은 72cm, 뒤 윗부분 폭은 57cm, 뒤 밑부분 폭은 63cm이다. 뚜껑은 약간 호형(孤形)으로 양쪽 변 길이는 234cm, 중간 길이는 256cm이고, 관 밑판은 평평하고, 길이는 256cm, 앞부분은 폭은 86cm, 뒷부분 폭은 24cm, 관 앞 높이는 84cm, 뒷부분 높이는 70cm이고, 모두 붉은 칠을 하였다.

발굴 시에 나무 판 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출토 중 파손되어 원상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곽 앞 36cm 되는 곳에 장방형 석갱(石坑)이 있는데, 구멍의 깊이는 25cm, 길이는 47cm, 폭은 41cm였다. 여기가 현궁지비(玄宮之碑)를 세운 곳이다. 현궁지비는 약간 푸른색이 나는 동석(茼石)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 높이는 145cm, 폭은 57cm, 두께는 23.5cm이다.

릉의 발견과 개관 당시의 상황은 기록도 하지 않았고 또 본 박물관 직원들의 실수로 관내의 물품, 종류, 수량, 위치 등 릉의 원형을 정확하게 찾을 수 없게 됨으로써, 그 역사적인 연구에 어려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발굴 당시와 개관시 목격자들과 광안당국 및 문학간 직원들이 당시 상황을 알려줌으로 써 어느 정도 불충분한 점들을 보충할 수 있었다.

발굴 당시 상황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곽 밑바닥은 진흙물이 고여 있었고, 관내는 열은 녹색 물이 조금 잠겨 있었으며 냄새도 있었다. 내관 뚜껑 위에는 파란 의복 한 벌이 덮여 있었고, 그 속에는 사직물 등이 들어 있었다.

곽 밑판과 곽 사이에는 비단 직물들이 있었는데, 개관 시 관안에서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고, 왕관, 바지, 신발, 버선 등의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주시해봐야 할 점이다.

대체적으로 볼 때 예릉의 규모는 크지 않고 소박했으며 출토된 기물들도 비교적 많지 않았으나, 비단 직물들이 좀 많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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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릉 현판 모습(초기)

 

중국 중경, 시조 황제의 예릉 초기 현판 모습이다.

현판 서각의 글자체는 최근의 것과 동일하나, 우측에 ‘徐文彬’(서문빈)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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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옥진 황제릉 현판 모습(최근)

 

sub2_03-16.jpg중국 중경, 시조 황제의 예릉 최근 현판 모습이다. 초기의 현판과 비교해보면 글자체는 같지만, 우측의 ‘徐文彬’(서문빈)이라는 글자가 없다.